악성림프종 치료 환자 수기 안방남
저는 1975년생 안방남 이라고 합니다. 한창 직장에 다니며 미래를 꿈꾸던 27살 젊은 시절 악성림프종이라는 진단을 받았습니다. 그때부터 투병생활이 시작되었고 지방에 있는 대학병원서 몇 번의 항암시도를 했으나 실패 결국 서울 아산병원까지 가게 되어 그곳에서 8번의 항암 끝에 조혈모세포이식을 받고 나서야 치료를 끝냈습니다.
경북경주에 사시던 어머니는 먼 곳을 오가시며 병수발 드시느라 눈물이 마를 날이 없으셨고 젊은 나이임에도 온몸에 기운이 다 빠질 정도로 처절한 싸움에 고통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습니다. 암 치료는 끝났지만 항암부작용으로 얻게 된 당뇨로 인해 매일 약을 복용해야 했고 그렇게 정기검진을 받으며 1년여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다행히 이식 후 경과가 좋아 다시예전생활로 돌아왔고 그때부터는 성공을 위해 뛰었습니다. 31살에는 결혼도하고 결혼 후에도 일에 대한 욕심이 끝이 없어서 밤낮없이 주말도 없이 일에만 매진했습니다. 성격이 지고는 못사는 타입이라 남들보다 좋은 차, 좋은 집에 사는 것만이 인생 최대목표였고 성공보수로 따라오는 돈만이 성공잣대의 기준이라 믿으며 앞만 보고 달렸습니다.
그러던 중 2009년 35살 되던 해 여름 심한 몸살과 함께 밤마다 설사와 열이 나고 식은땀에 젖는 날이 계속되었습니다. 몸을 너무 혹사해서 몸살이 오래가는 것이라 생각해 동네병원을 찾았고 “장염이다”라는 말에 약을 먹었으나 그때뿐 또 다른 병원서는 “결핵이다”라고 해 의사 진단만 믿고 약을 복용하는 날이 이어졌습니다. 175m에 80kg나가던 통통했던 몸이 점점마르더니 한 달 새 10kg이 빠지면서 음식조차 먹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불길한 예감에 서울대학병원을 찾았고 검사결과 청천병력 같은 악성림프종 재발이라는 진단을 받게 되었습니다.
하루가 다르게 몸은 말라 58kg의 앙상한 채로 입원날짜가 다되어서는 걸음조차 걷기 힘든 지경까지 이르렀습니다. 교수님은 종양이 너무 급속도로퍼지고 있고 위치도 안 좋아(폐와 그 주변에 모두 퍼진 상태) 아내에게 예후가 좋지 않다는 말과 함께 처음부터 고용량항암을 해야 하니 각오를 단단히 하라고 얘기를 하셨습니다. 치료방향에 대해서는 항암의 경과가 좋아 다행히 관해가 된다면 골수이식(동종이식)을 해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무균 실에서 항암을 투여 받았고 ‘’항암쯤이야 이겨낼 수 있어~이번이 처음이 아니잖아‘’ 마음속으로 다짐하고 아내와 어머니에게 걱정 말라고 했지만 의지처럼 쉬운 게 아니었습니다. 3번째 항암을 받을 땐 신장수치가 너무 떨어져 자꾸 중단사태가 생겼고 온몸은 발진이 생기고 부어오르고 당장 죽을 것 같은 고통에 나의 몸은 끝내 더 이상 견뎌내질 못하고 쓰러져 위험한 고비를 맞았습니다.
설상가상 나와 유전자가 맞는 사람이 국내는 물론 해외에서도 찾지 못했다는 슬픈 소식도 전해졌습니다. 사람 인생이란...참...이렇게 허망하게 죽는 구나 눈물도 말라서 쓴웃음만 나오고 옆에 있는 아내를 보며 미안한 마음에 밤마다 죽음의 공포와 싸운다는 말은 차마 입 밖으로 꺼내질 못했습니다.
몸은 망가질 대로 망가지고 밥한 숟갈 넘기기 힘들어 모든 것이 자포자기 상태가 되었습니다. 퇴원 후 집으로 가는 차안에서 우연하게 같은 병실 환우에게 들었던 한의원생각이 났습니다. 이런 꼴로 고향어머니를 볼 낯도 없어 몸도 추스릴겸 전주에 있는 민속한의원으로 방향을 돌려 무작정 찾아갔습니다. 도착시간이 너무 늦어 그날 밤은 근처숙소에서 잠을 청하던 밤 난 아직 너무 젊은데 앞으로의 인생계획을 모두 세웠는데 내가 죽으면 우리가족은.....?? 물음표를 아무리 던져도 원망만 나오고 답을 찾을 길도 헤쳐 나갈 힘도 내게는 남아있질 않았습니다. 병마와 싸워서 패배한 인간일 뿐이었고 항암에 굴복한 나약한 낙오자일 뿐이라는 생각으로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 그렇게 가고 있었습니다.
다음날아침 간단한 절차와 함께 원장님께 진료를 받게 되었습니다. 원장님은 저를 보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무엇을 위해 살아왔냐고 물었고 난 주저 없이 ‘’성공‘’이라고 답했습니다. 그랬더니 성공은 뭐로 판단하냐길래 ‘’돈‘’이라고 대답했습니다. 얼마가 있어야 성공한 거냐 액수를 말해봐라 라고 하시는데 거기서 말문이 막혀버렸습니다. 죽어가는 사람한테 무슨 말씀을 하시고 싶으신 걸까 특이하신 분 인가보다 라고 속으로 생각했지만 원장님이 하시고 싶은 말씀은 물질만을 쫒으며 몸을 혹사했던 나의 삶을 꾸짖으시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아니 생각까지도 바꿔야 살 수 있다는 걸. 깨우치고 시키는 대로 하겠다 하였습니다. 원장님께서는 자신이 해줄 수 있는 건 한약을 처방해주는 것 밖에는 없다. 모든 건 환자자신이 알아서 해야 한다. 어떻게 하면 살 수 있는지를 알려줄 테니 그걸 따르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처음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습니다. 무슨 도사님 말씀 같기도 하고 너무 허무맹랑한 소설 속 얘기 같아서 한 시간여 상담을 받고 나오는데 머리가 멍해졌습니다. 아내는 확신에 찬 얼굴로 “원장님 말씀대로만 하면 당신 살 수 있어‘’라며 의지를 보였고 얼떨결에 다음 주로 입원날짜를 잡고 약도 지어주시면 열심히 복용하겠다. 약속하고 짐을 꾸리러 집으로 왔습니다. 한의원에 입원한다 했더니 어머님은 죽으러가는 사람마냥 눈물바람이셨고 아내와 나는 서로의 두려움을 숨긴 채 애써 태연한척 씩씩한 척 그곳에 들어갔습니다.
산에 오르며 나쁜 생각을 떨쳤고 원장님 말씀대로 바보가 되서 싱글벙글 웃으며 모든 잡념을 버렸습니다. 며칠이지나 알게 된 건 항암부작용으로 계속된 두통이 사라졌고 당뇨도 관리가 잘되어 약도 끊게 되었습니다. 변화는 그것뿐만이 아니라 매일 산을 오르다보니 체력이 점점 좋아지고 풀냄새 나무
냄새 흙냄새가 이렇게 좋은 건지 산이 위대해보였습니다. 아내는 무슨 여행에 온 거 마냥 표정이 밝아져서는 이젠 서로의 얼굴을 보며 웃는 여유까지 생겼습니다. 입원 중에 제공하는 프로그램 중 단전호흡시간에 제일 먼저 가서 수련을 받았고 원장님이 중요시하는 마늘을 끼니때마다 식당에 가서 열심히 챙겨먹었습니다. 그곳에서 나오는 식사는 모두 친환경채소 위주식단에다 죽염으로 간을 해서 매끼니 다양한 반찬들이 나오니 음식양도 점점 늘어나고 소화기능도 좋아져서 먹고 싶은 음식도 머릿속에 떠올리며 얼른 건강해져서 가족과 꼭 먹어야지...라는 작은 소망도 생기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먹을 것을 철저히 지켜야 된다고 원장님께서 귀에 딱지가 생길정도로 강조하셔서 그것만이 살길이라고 다짐하고 또 다짐했고 잘못된 생활습관을 모두 버려야 된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된 나 자신을 다시 한 번 채찍질하게 되었습니다.
사람은 대자연의 순리를 따라야 한다는 걸....음식이 나의체질과 운명을 결정짓는다는 걸...과로와 스트레스가 지금의 병을 만들었다는 걸....이제야 알게 되었습니다. 더도 말고 지금 이런 몸 상태로 20년 아니10년만 더 살았으면 하는 간절함이 생겼고 지금대로라면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자신감도 생겼습니다. 내가 중병환자라는 사실이 사라지고 맘이 너무나 편안해졌습니다. 퇴원 후 집에 와서도 원장님이 해주신 약을 꼬박꼬박 챙겨먹고 매일매일 죽염 마늘을 열심히 복용했습니다. 아내는 항상 약차를 다리느라 가스불앞에서 떠날 줄 모르는 그런 생활이 계속되었습니다. 그렇게 두 달 세 달이 가고 여름이 지나 가을겨울 다시 봄이 되었습니다.
병원에서 치료를 중단하고 나온 지 일 년 한의원을 찾아가서 치료를 시작한 것도 일 년 2011년 5월 28일 서울대병원에 검사가 있는 날이라 당일 입원을 하게 되었습니다. CT 촬영을 해야 하는데 신장이상으로 조영제를 함부로 쓸 수가 없다하여 전날부터 약을 먹고 당일 아침 입원하여 수액을 맞으며 오후가 되어서야 끝이 나고 퇴원하였습니다. 그리고 6월2일은 교수님 진료 보는 날 검사결과가 나오는 날이라 전날부터 잠을 설치고 긴장을 너무해서 정신이 하나도 없었습니다. 진료 실안으로 들어가니 교수님이 두 장의 CT 촬영사진을 보여주었습니다. 하나는 일 년 전 치료를 중단하기 전에 사진 하나는 5일전 찍은 사진 교수님은 두 사진을 보시더니 저의얼굴과 사진을 번갈아 보시고는 일 년 동안 대체 무슨 치료를 하였느냐고 물으셨습니다. 첫 번째 사진에 있는 종양덩어리가 두 번째에는 아무것도 없이 완전히 깨끗한 나의 폐 사진이었습니다. 어떻게 이런 일이.....난 말문이 막혀 아무 말도 하지 못했고 교수님은 지금처럼만 생활하면 된다. 축하한다며 웃으셨습니다.
꿈인지 생시인지 제일먼저 아내에게 전화를 걸어 이 사실을 알렸고 다음으로는 민속한의원 원장님께 전화를 걸어 지금 이 꿈같은 현실을 흥분해서 말씀을 드렸습니다. 원장님은 허허 하시며 여전히 도사님처럼 큰 반응이 없으셨습니다. 응당 그런 결과가 당연하다는 듯이...하지만 느낄 수 있었습니다. 저의 오늘의 벅차있는 감동을 가슴으로 느끼고 계시다는 것을....잘했다 칭찬보다는 앞으로가 더 중요하다는 말씀과 함께 원장님께서도 CT사진 보고자 하셨습니다. 전화를 끊고 나서 오늘은 나 자신에게 칭찬한마디 해주어도 되는 날이지 않겠나! ‘’방남아 너 정말 잘했다 대견해‘’ 이젠 오늘까지만 울고 눈물은 더 이상 흘리지 않을 거란 다짐도 했습니다.
밤이 되어서야 집으로 가니 아내와 가까운 사람들이 축하한다며 축하 케이크에 불을 붙여주었습니다. 자꾸만 웃음이 나와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100명의 의사보다 음식절제가 낫다‘’ 는 영국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마음속에 새겨야할 말인 것 같습니다. 그날 케이크는 맛보지 못했지만 먹는 즐거움보다 이곳에 서있는 것만으로도 벅찬 감격의 하루였습니다. 나에게 크나큰 용기를 준 가족께 평생 은혜 갚으며 살 것입니다. 그리고 저와 같은 환자를 살리시는 일에 평생 매진하고 계신 원장님께 경의를 표합니다. 장마가 오기 전에 CT 촬영사진을 들고 원장님 뵈러 다녀와야겠습니다. 그때는 꼭 여행 떠나는 기분으로....
2011년 7월 경주에서 안방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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